고려왕조 계보 역대 왕 이름과 순서 – 태조 왕건부터 34대 공양왕 업적

태봉(후고구려)을 건국한 궁예의 장수였던 왕건은 태봉국의 시중으로 2인자의 자리까지 올라가고 궁예가 폭정으로 민심을 잃자 여러 장수들과 대신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 받게 됩니다.

태조 왕건이 918년 건국한 고려는 1392년 공양왕까지 총 34대에 거쳐서 475년 동안 존속했으며 유교적인 이념을 통해서 사회질서를 마련하고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요나라의 대규모 침략을 막아낸 고려는 동아시아에서 나름대로 위새를 뽐내는 기간이 있었지만 중기 이후에는 무신정권과 몽골의 침입,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으로 국력이 약해집니다.

이번 시간에는 936년에 후삼국시대를 통일하고 우아한 고려청자와 세계적인 인쇄술을 자랑했던 고려의 왕조 계보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 태조

신성대왕(神聖大王) 918-943

신라의 문무왕에 이어서 2번째로 한반도를 통일한 왕건은 골품제를 유지해서 백제의 지배층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한 신라와 다르게 능력이 있으면 누구나 고위 관리가 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으며 왕권 안정을 위한 호족 포섭을 위해 29명의 아내를 거느렸다.

2대 혜종

의공대왕(義恭大王) 943-945

자신을 시해하려고 침소에 침입했던 자객을 맨손으로 제압하고 10대 어린 나이부터 왕권을 따라서 전장을 누빌 정도로 강인한 모습을 보였지만 심성이 착해서 동생들과의 권력 다툼을 외면하다가 암살의 위협으로 조울증을 앓았으며 공포에 떨다가 2년 만에 붕어하게 된다.

3대 정종

문명대왕(文明大王) 945-949

야심이 많은 성격으로 정략결혼을 했던 신명순성왕후는 당시 강력한 호족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배후의 든든한 기반으로 반대 세력을 숙청해서 힘을 약하게 만들고 개혁을 시도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죄의식을 느끼다가 일찍 붕어하고 말았다.

4대 광종

대성대왕(大成大王) 949-975

호족들의 세력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노비안검법을 시행하고 한반도 최초의 과거제 실시, 신하들의 공복 색깔을 제정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후원하던 평주 박수경 일가를 몰락시킬 정도로 호족을 견제했다.

5대 경종

지인성목명혜헌화대왕 975-981

광종의 유일한 아들이었지만 대규모 호족을 숙청하는 과정 때문에 불안한 유년기를 보낸 경종은 전시과라는 제도를 통해서 신하들에게 토지를 지급했으며 합법적으로 보복을 허용하는 복수법을 허용하면서 호족부터 일반 백성까지 고려에 큰 피바람을 몰고 오게 된다.

6대 성종

문의대왕(文懿大王) 981-997

유교식 예법을 도입하고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는 불교 폐단을 개선한 성종은 중앙정부 재편성을 통해서 국가 제도의 기틀을 잡았지만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서 과거 시험을 통해서 권력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세습하는 문벌귀족 사회를 초래하게 된다.

7대 목종

선양대왕(宣讓大王) 997-1009

서경 우대, 인재 등용, 외교, 전시과 개정 등 긍정적인 모습도 있었지만 그의 어머니 천추태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문제가 되었고 동성애적인 성향으로 남자들을 곁에 두고 여자에게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도 선정왕후 유씨 한명만 있었으며 슬하에 자식도 없었다.

8대 현종

원문대왕(元文大王) 1009-1031

아버지 왕욱은 왕건의 8번째 아들, 왕욱의 어머니는 신라의 신성왕후 김씨로 고려와 신라 왕실의 혈통을 가진 현종은 출생의 비밀 때문에 절에 숨어있었지만 강조의 정변으로 왕이 된 이후 거란의 3차 칩입을 막아내고(강감찬 귀주대첩) 나라를 안정시킨 위대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9대 덕종

광장강명선효경강대왕 1031-1034

아버지 현종의 붕어로 16세의 나이로 즉위한 덕종은 고려서 최초로 국자감시를 시행하여 폭넓게 인재를 등용하는 등 선정을 펼치며 고려의 태평성대를 이끌어 나갔지만 재위한지 3년 만에 병석에 누웠고 동생인 평양군 왕형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준 다음 19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10대 정종

용혜대왕(容惠大王) 1034-1046

거란의 협박에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군사력을 보강하며 거란의 침입을 막고 이후에는 거란과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강중국으로 위상을 떨치지만 정종이 재위하는 기간 동안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아서 정신적으로 부담이 됐는지 재위 12년 29살의 나이로 승하했다.

11대 문종

장성인효대왕(章聖仁孝大王) 1046-1083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꾀하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이 없도록 법을 개정, 중앙 집권 체제의 강화, 고려의 조세 제도 완성, 무관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는 등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전쟁이 없어서 문화적으로 다양한 발전을 하지만 문벌 귀족의 힘이 크게 강해진 시기다.

12대 순종

정헌영명선혜대왕 1083-1083

아버지 문종의 죽음으로 너무 슬퍼해서 그랬을까? 태자로 28년 동안 있었던 순종은 원래도 약했던 몸이 즉위한 이후에는 더 악화돼서 3개월 만에 부왕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다.

13대 선종

안성사효대왕(安成思孝大王) 1083-1094

이 시기의 고려는 동아시아 강국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거란과 송나라의 관계에서 당당한 자세를 보였으며 그전의 명군들이 나라를 잘 이끌고 제도를 안정화 시켰기 때문에 가뭄이나 한파와 같은 기상이변을 제외하고는 큰 문제가 없었다.

14대 헌종

정비공상대왕(定比恭殤大王) 1094-1095

선종의 아들로 병약한 몸으로 재위한지 1년 만에 14살의 어린 나이로 붕어했다.

15대 숙종

명효대왕(明孝大王) 1095-1105

주화도감을 만들어서 해동통보, 삼한통보 화폐를 만드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긴 군주로 기록하고 있지만 자신의 조카 자리를 빼앗고 왕이 되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으며 북벌을 시도하면서 잦은 전쟁으로 국력을 소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6대 예종

문효대왕(文孝大王) 1105-1122

고려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마지막 군주로 경연을 한국사에서 처음 시행했으며 문벌귀족 사회에서 이례적으로 무과를 설치하고 장학재단인 양현고를 운영해서 과거제도에 힘을 실어주고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모습으로 송나라에서는 최고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보여줬다.

17대 인종

극안공효대왕(克安恭孝大王) 1122-1146

기존 문벌귀족 사회의 문제로 지배층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결국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고려의 전성기가 무너지던 시기로 인성은 좋았지만 고려가 쇠퇴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그나마 김부식에게 명해서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되었음

18대 의종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1146-1170

초반에는 문신을 견제하고 무신을 키우려는 모습을 보이나 싶었지만 말년에는 향락과 사치를 즐기며 무신정변을 일어나게 만들어서 피비린내를 진동하게 만들고 고려 왕조의 태평성대를 무너지게 만든 암군으로 이의민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19대 명종

황명광효대왕(皇明光孝大王) 1170-1197

무신정변으로 의종과 태자가 쫓겨나면서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명종은 사실상 아무런 힘이 없는 허수아비와 같았으며 군부(정중부)에 의해서 옹립되었기 때문에 이의민을 제거한 무신 최충헌에 의해서 폐위되고 말았다.

20대 신종

경공정효대왕(敬恭靖孝大王) 1197-1204

왕위와는 관계가 없었지만 최충헌이 명종을 내쫓고 53살의 나이에 왕이 된 그는 맏형과 셋째 형을 자신들 마음대로 옹립했다가 폐위시킨 반란군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는데 최충헌의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최충헌과 그의 측근들의 직위를 올려줄 수밖에 없었다.

21대 희종

성효대왕(誠孝大王) 1204-1211

최충헌과 흉적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해 폐위되고 말았다.

22대 강종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 1211-1213

1197년 9월, 최충헌이 부왕 명종을 폐위시키면서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지만 1211년 12월 자신을 죽이려다 실패한 희종을 폐위시키면서 강종을 다시 불러서 왕으로 추대했는데 즉위할 당시 나이는 60대로 이미 늙고 병들었으며 당시 정권은 최충헌이 뒤흔들고 있었다.

23대 고종

안효대왕(安孝大王) 1213-1259

고종 4년인 1216년부터 몽골이 고려로 침입하기 시작했고 당시 고종은 최씨 일가에 끌려다니면서 굴욕을 맞봐야 했는데 그나마 이 시기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을 조판했다.

24대 원종

순효대왕(順孝大王) 1259-1274

마지막 고려의 천자로 원 갑섭기의 시대를 열었지만 그나마 자치권을 지켜내서 다시 한번 고려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노력한 군주로 보는 시선도 있다.

25대 충렬왕

경효대왕(景孝大王) 1274-1308

73세의 나이로 고려 국왕 34명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지만 처음으로 묘호가 없는 국왕으로 부왕 시절 원나라에게 굴복하고 충렬왕 자신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원나라의 간섭은 더 심해졌지만 고려의 문화를 지키고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26대 충선왕

충선헌효대왕(忠宣憲孝大王) 1298-1298, 1308-1313

고려인과 몽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고려인이 아니라 몽골인으로 성장했지만 고려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원나라의 영향력이 강했기 때문에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27대 충숙왕

충숙의효대왕(忠肅懿孝大王) 1313-1330, 1332-1339

고려 역사에서 최악의 폭군으로 평가받는 충혜왕과 개혁으로 유명한 군주 공민왕의 부왕으로 원나라에게 매번 끌려다니긴 했으나 원나라에 보내는 세공을 삭감하는 업적을 남겼다.

28대 충혜왕

헌효대왕(獻孝大王) 1330-1332, 1339-1344

사람을 숙청하거나 죽이지는 않았지만 성욕을 주체하지 못했던 왕으로 심지어 장모와 새어머니를 겁탈하기도 했는데 이를 보다 못한 신하들이 원나라 황에게 청하여 폐위되고 귀양을 가는 도중 30세의 젊은 나이로 급서했고 고려 백성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9대 충목왕

현효대왕(顯孝大王) 1344-1348

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모후 덕녕공주의 섭정을 받으며 개혁을 위해 착실하게 치적을 쌓았지만 재위 4년 만에 병에 걸려 승하했다.

30대 충정왕

1349-1351

고려사에 의하면 폭군으로 전해지며 향년 16세의 나이로 원나라에 의해 독살 당했다.

31대 공민왕

인문의무용지명열경효대왕 1351-1374

왕이 된 그는 원나라 생활을 하면서 원이 쇠퇴할 것을 믿었기 때문에 1356년 병신정변을 통해서 반원 정책을 펼쳐나갔지만 우유부단한 성격과 의심이 많아서 신하들을 다스리지 못하고 숙청을 통해서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32대 우왕

여흥왕(驪興王) 1374-1388

혼란하던 시기에 왕이 되어서 음주 가무와 여색을 즐기는 모습을 보이던 우왕은 이성계 일파에게 폐위되었기 때문에 묘호와 시호는 없으며 아들과 함께 25세의 나이로 처형당한다.

33대 창왕

윤왕(允王) 1388-1389

아버지 우왕이 폐위를 당하자 이성계의 반대 세력인 조민수와 이색이 8살 어린아이를 왕으로 옹립하게 되었지만 실권은 없는 허수아비 왕일 뿐이었다.

34대 공양왕

1389-1392

창왕을 폐위하고 이성계 일파는 그를 선양의 도구로 쓰려고 하지만 공양왕은 왕씨 사직을 지키기 위해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고려의 마지막 임금으로 고려 왕조를 지키려고 했지만 결국 자신의 목숨과 나라 모두를 잃게 된다.


농업 기술이 미비하고 잦은 자연재해로 고생하던 고려는 조선과 비교해서 자주적인 국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17대 인종 이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까지 암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려왕조에 대한 실록이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하지만 전부 유실되었기 때문에 조선과 북송의 편파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자료만 남았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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