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가계도 –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은 이유, 원인 (임오화변)

조선의 21대 국왕 영조는 왕실 최초로 왕세자(子)가 아닌 왕세제(弟)로서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숙종과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724년 31세 늦은 나위로 즉위했지만 역대 조선의 국왕 중에서 가장 장수한 군주로 52년 동안 왕위에 집권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오랜 기간 왕의 자리를 지키면서 많은 공적을 남겼지만 과오도 범하였는데 대표적인 사건으로 그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일 것이다.

임오화변 당시 영조는 69세의 나이로 조선의 역대 군왕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사도세자를 처형한 이후로도 14년 동안 조선을 다스렸다.

이번 시간에는 영조의 업적과 가계도, 유일한 후계자였던 사조세자(장조)의 뒤주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1. 가계도

① 숙종

영조의 아버지이자 조선의 제19대 임금 숙종은 몸은 허약했지만 불같은 성격으로 환국 정치를 펼쳤으며 상평통보를 발행하면서 화폐 개념을 발전하게 만들었다.

② 숙빈 최씨

영의정에 추증된 최효원의 딸로 7세가 되는 해 궁에 들어와서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였지만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왕자를 낳았기 때문에 수많은 견제를 받는다.

③ 영조

조선의 21대 국왕으로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먼저 태어난 형(영수)이 있었으나 요절했으며 아래로 태어난 동생도 어린 나이로 죽었다고 한다.

④ 정성왕후 서씨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는 33세의 나이로 왕비가 되었는데 재임 기간이 가장 길지만 사이가 나빠서 영조는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고 찾지 않았다.

⑤ 정순왕후 김씨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는 정치에 개입을 하면서 조선 후기를 말아먹은 최악의 악녀로 평가받는 경우가 많지만 노론 음모론의 피해자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⑥ 정빈 이씨

영조의 왕자 시절에 첩이 되었다가 자식을 낳아서 첫 번째 후궁이 되었지만 독살 의혹으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⑦ 영빈 이씨

6세 어린 나이로 궁녀로 일하다가 영조의 두 번째 후궁이 되었으며 사도세자를 포함한 대분의 자식들이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비운의 여성이다.

⑧ 귀인 조씨

10세의 나이로 궁녀로 들어와 29세에 숙원이 되었는데 1740년 딸 화유옹주를 낳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남아았지 않다.

⑨ 숙의 문씨

영조의 서장남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 조씨를 모시는 궁녀였으나 영조의 눈에 들어와 후궁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영조가 승하하자 몰락하고 말았다.

2. 뒤주 사건

영조 38년(1762) 영조는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8일 동안 물과 음식을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비상식적인 임오화변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영조는 자신의 하나뿐인 후계자를 왜 이렇게 잔인하게 죽인 것일까?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 태어난 사도세자는 극진한 사랑을 받았는데 당시 영조는 42세의 나이로 다른 아들을 두지 못하여 난감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어린 나이에도 총명한 모습을 보였는데 영조는 태어난 지 100일도 안된 세자를 생모 영빈 이씨와 떨어트려 궁인들에게 맡기게 된다.

기대가 너무 큰 탓인지 영조는 사도세자를 엄격하게 대하고 혼내기 시작했으며 이에 사도세자는 점차 소심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영조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도세자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기 시작했고 사소한 문제로 트집을 잡아서 학대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왜 영조는 사도세자를 괴롭게 만든 것일까?

① 질투

영조는 왕세제를 거쳐서 즉위하였으며 어머니 숙빈 최씨는 신분이 미천하여 매번 정통선 문제로 신하들에게 시달리는 일들이 많았다.

그런데 사도세자는 정통성에 대한 문제가 없었으며 영조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영조가 편하게 왕이 될 수 있는 사도세자를 갈굴 이유가 없었지만 일각에서는 질투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학대했다고 말한다.

② 성격

영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의 외모나 생각은 고조부 효종과 매우 닮았으며 머리는 총명하지만 배우고 익히는 것보다는 무(武)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병약했던 영조와는 다르게 무골로 태어나서 체격이 크고 다양한 무술을 배웠으며 이후 무예도보통지의 기초가 된 무예신보를 편찬하기도 했다.

영조는 자신과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는 사도세자를 보면서 공부를 게을리하고 신체 수련에만 신경 쓴다고 생각하여 계속 질책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 영조의 정신적 문제와 기질이 사도세자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어 비행을 일삼게 만들고 파국을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에 의해서 죽는 모습을 본 정조(이산)는 큰 충격을 받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지만 조선왕조 최후의 명군으로 평가받고 있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왕위를 계승 받는 사도세자의 모습은 환국 정치의 끝자락을 경험했던 영조의 눈으로 봤을 때 마음에 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지속적인 질책과 학대를 이기지 못한 사도세자는 정신이상 증세가 극에 달하면서 후궁 경빈 박씨를 살해하고 아버지와 세손을 죽이겠다고 소리를 지른다.

이 모습을 지켜본 영빈은 세손을 지키기 위해 사도세자의 광기 어린 모습을 영조에게 고했으며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임오년의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이유에 대해서는 계속된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 상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승정원일기>가 파기되어 지금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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