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조 순서 계보 정리 – 박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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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군주제 국가 신라는 약 991년 동안 56명의 국왕을 거치며 한국사에서 가장 긴 시간 동안 존속하여 천년 왕국으로 불린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면서 삼국통일을 이루었으며 676년 이후에는 통일신라로 지칭되며 사실상 한반도의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신라 계보를 보면 박씨, 석씨, 김씨, 3가지 성씨가 번갈아가며 왕위를 이어가는데 이런 방식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 찾아봐도 특이한 모습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고대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 중에서 건국 시기가 가장 빠르기 때문에 현대의 한국어는 신라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번 시간에는 한국사 왕조 중에서 즉위한 왕이 가장 많고 유일하게 여성 군주가 존재했던 신라왕조 순서와 계보에 대해서 알아보

1. 박혁거세 (朴赫居世)

기원전 57년 ~ 기원후 4년 (61년)

박혁거세
박혁거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는 표주박 같이 생긴 알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으며 삼국사기에서는 혁거세 거서간으로 쓰여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면 나라를 다스린지 61년이 되던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다가 8일만에 토막나서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고 한다.

2. 남해 차차웅(南解)

4년 ~ 24년 (21년)

박혁거세의 죽음이 미심쩍은 상황에서 왕이된 남해는 박혁거세와 알영부인의 아들로 뒤에 붙는 차차웅이라는 군주 호칭은 무당을 의미하는 신라의 방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가 즉위당시 낙랑의 군사들이 침공했다가 물러나고 천재지변의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3. 유리 이사금(儒理)

24년 ~ 57년 (33년)

남해 차차웅과 운제부인의 장남으로 초기 신라에 틀을 잡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고 알려져 있으며 뒤에 붙는 호칭 이사금은 군주, 임금을 뜻하는 말로 볼 수 있다.

그는 노약자를 돌보는 복지 정책을 펼치며 백성들을 돌보기 시작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신라로 몰려왔으며 피난온 사람들도 신라에 살도록 배려했다.

4. 탈해 이사금(脫解)

57년 ~ 80년 (24년)

박씨가 아니라 신라의 석씨 왕조의 첫번째 국왕으로 등장 설화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편인데 박혁거세와 마찬가지로 큰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국왕의 성씨가 바뀌는 이유는 33년동안 재위했던 남해 차차웅이 중병에 걸리자 두명의 아들 보다는 매제 석탈해의 재능이 뛰어나 왕위를 맡겼기 때문이다.

5. 파사 이사금(婆娑)

80년 ~ 112년 (33년)

본격적으로 영토를 확보하면서 진한의 일개 소국이었던 신라를 맹주급으로 발전시킨 군주로 일각에서는 실질적인 신라의 시초라고 평가하고 있다.

파사 이사금은 왕위에 오르자 사형수가 아닌 죄수를 모두 풀어주고 농업과 병사 훈련에 집중을 했는데 덕분에 85년 백제의 침입과 94년 가야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는다.

6. 지마 이사금(祇摩)

112년 ~ 134년 (22년)

파사 이사금의 아들로 즉위하자 마자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맺고 가야를 공격했지만 큰 소득없이 군사를 되돌리고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왜구의 공격에 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123년 3월 일본과 화친을 하고 백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말갈족의 공격을 막게된다.

7. 일성 이사금(逸聖)

134년 ~ 154년 (21년)

박씨 족보를 보면 44년생이라고 말하지만 출생이 불분명하며 삼국사기에는 유리 이사금의 장남 일지 갈문왕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다르게 나온다.

그가 재위할 당시에도 말갈족의 침입이 잦아서 142년 7월에는 반대로 공격을 하자는 이야기를 했지만 이찬 웅선의 반대로 포기하게 된다.

8. 아달라 이사금(阿達羅)

154년 ~ 184년 (30년)

전기 신라의 마지막 박씨왕 박아달라 시기에는 백제와 사이가 나빠졌는데 서로 화친과 침략을 반복하는 애매한 사이가 되었다.

이 시기의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백제와 전쟁, 자연재해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신라 내부의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174 ~ 184년까지 기록이 비어있다.

9. 벌휴 이사금(伐休)

184년 ~ 196년 (12년)

박씨 마지막 왕 이달라 이사금에게 후손은 있었지만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석탈해의 손자, 탈해 이사금의 아들 각간 구추의 아들 석벌휴가 국왕 자리에 오른다.

석씨 가문이 즉위하는 과정에는 많은 의혹이 존재하는데 군사적인 힘이 있었는지 이전 시대보다 많은 군사활동을 진행하면서 땅을 넓히게 된다.

10. 내해 이사금(奈解)

196년 ~ 230년 (34년)

벌휴 이사금의 손자로 아버지와 삼촌이 할아버지보다 일찍 사망해서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으며 재위 기간 내내 백제와 치고 받고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사금의 능력이 뛰어났는지 신라는 백제를 압도할 정도의 국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그가 즉위한 이후에는 좋은 징조들이 하나 둘 나타나게 된다.

11. 조분 이사금(助賁)

230년 ~ 247년 (17년)

벌휴 이사금의 장남 골정의 장남으로 당시에는 대외 전쟁이 활발했기 때문에 본인 보다 대장군 석우로의 기록이 더 많이 남아있다.

그래서 조분 이사금에 대해서 남아있는 기록이 변변치 않은데 그나마 232년 기병을 활용해서 경주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12. 첨해 이사금(沾解)

247년 ~ 262년 (14년)

벌휴 이사금과 갈문왕의 딸 김씨 옥모부인의 장남으로 즉위한지 두달이 지난 247년 7월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으로 봉하면서 본인또한 신격화 시키는 모습을 보인다.

그가 즉위할 당시에는 왜군의 공격으로 피난을 갈 정도로 상황이 안좋았으며 신라 최고의 왕족 석우로의 석연찮은 죽음도 있었는데 자신 또한 의문의 최후를 맡는다.

13. 미추 이사금(味鄒)

262년 ~ 283년 (22년)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6대손 김미추는 정상적인 즉위 과정을 밟지 않고 석씨 왕실의 사위 자격으로 국왕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한동안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그는 신하들이 궁전을 고치자고 건의했으나 백성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면서 다른 나라의 공격을 무난하게 막았다고 한다.

14. 유례 이사금(儒禮)

283년 ~ 298년 (12년)

조분 이사금, 나음 갈문왕의 딸 박씨의 아들로 출생 설화를 보면 어머니 박씨의 입에 별빛이 들어온 뒤 유례 이사금을 임신했고 아이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즉위할 당시 이서고국과 전쟁을 하면서 멸망시키고 왜국의 공격이 만항지면서 오히려 왜국 원정을 시도해서 일본을 공격하기도 했다.

15. 기림 이사금(基臨)

298년 ~ 310년 (12년)

조분 이사금의 아들, 손자, 증손자라는 설이 존재할 정도로 가계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진 것은 없으며 별다른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300년 정월 왜국과 강화를 맺어서 화친하고 낙락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을 했다고 하는데 사실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6. 흘해 이사금(訖解)

310년 ~ 356년 (47년)

신라 역사상 석씨 왕실의 마지막 왕으로 이사금 칭호를 마지막으로 사용했으며 이후 석씨 어머니를 두고있는 실성 마립간을 제외한 석씨 일가는 왕계에서 모습을 감춘다.

재위 기간 내내 왜의 공격으로 즉위 3년(312년)에는 왜왕의 아들과 아찬 급리의 딸을 결혼시켜 침입을 줄이는데 성공했지만 344년 다시 외교가 단절된다.

17. 내물 마립간(奈勿)

356년 ~ 402년 (47년)

흘해 이사금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김씨인 내물 마립간이 왕위를 잇게 되었으며 여기서 마립간은 매금, 대군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삼한의 패권이 백제에서 고구려로 넘어가는 시기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국가를 보존하는데 성공하여 이후 신라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18. 실성 마립간(實聖)

402년 ~ 417년 (16년)

최초의 김씨 군주였던 미추 이사금의 조카 이찬 대서지와 아찬 석등보의 딸 이리부인의 아들로 왕위에 올랐는데 고구려의 입김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는 직접 기병을 이끌고 백제와 왜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미래를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 눌지 마립간(訥祗)

417년 ~ 458년 (41년)

실성 마립간 시절 고구려의 속국 취급을 받고 왜의 침입을 막느라 허덕였던 신라를 다시 자주적으로 되돌리고 신라의 전성기의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왕이다.

그는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확보하고 소가 끌 수 있는 수레를 보급하여 농업을 발전시키면서 꾸준히 내정을 다지고 백제와 손을잡아 고구려와 전쟁을 준비한다.

20. 자비 마립간(慈悲)

458년 ~ 479년 (21년)

눌지 마립간과 실성 마립간의 딸 차로부인의 아들로 주목 받을만한 업적은 없지만 왜인의 공격이 심해지자 성을 쌓으면서 나라의 방어를 튼튼하게 만들었다.

그가 즉위할 당시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고 보수하는 기록이 많은 편인데 당시 왜구와 고구려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축성이 정답이었기 때문이다.

21. 소지 마립간(炤知)

479년 ~ 500년 (21년)

자비 마립간의 아들로 그는 특이하게 삼국유사의 오기일(정월 대보름), 삼국사기의 처녀 벽화 두가지 일화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유난히 많은 편인데 일본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던 소지 마립간은 500년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다.

22. 지증왕(智證)

500년 ~ 514년 (14년)

소지 마립간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64세 고령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증왕은 늦게 왕위에 올랐지만 14년이라는 시간동안 재위하고 78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렸다.

그가 즉위할 당시에는 전쟁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내정을 개혁하면서 국력을 증대하는데 집중하면서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중국식인 왕(王)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23. 법흥왕(法興)

514년 ~ 540년 (36년)

귀족의 반대로 널리 퍼지지 못한 불교를 신라에 공인한 왕으로 법흥의 법은 불법(佛法)을 의미하며 신라의 토착 종교의 성지를 부수고 절을 짓게된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신라의 체계를 확립하는 동시에 국력을 신장시켰기 때문에 다음 왕대에 전성기를 누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24. 진흥왕(眞興)

540년 ~ 576년 (36년)

법흥왕의 동생 입종 갈문왕과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고구려와 백제가 싸우는 동안 쌓아온 국력을 통해서 신라 최고의 정복군주로 손꼽히게 된다.

그는 청년기 시절 정복을 많이 했는데 가야를 흡수하면서 신라의 영토를 3배 이상으로 크게 만들었으며 군사적 요충지와 자원을 확보하게 된다.

25. 진지왕(眞智)

576년 ~ 579년 (4년)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끈 김춘추의 할아버지로 이름(김사륜)은 불교의 전륜성왕에서 따왔는데 출가하면 부처가되고 왕이 된다면 전륜성왕이 될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진지왕이 음탕한 짓을 한다는 이유로 4년만에 폐위당하고 승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공격에 대비했다는 기록만 존재한다.

26. 진평왕(眞平)

579년 ~ 632년 (54년)

다른 나라의 침략과 왕권의 약화로 불안한 상황의 신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린 왕이지만 당시 김유신, 김춘추 같은 위인들이 등장하여 존재감이 적은 편이다.

재위 기간이 워낙 길기 때문에 고루려, 백제와 전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 말년의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반란 등 그에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27. 선덕여왕(善德)

632년 ~ 647년 (15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한반도 최초의 여왕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의 장녀로 불교 문화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불교 문헌에서 평가는 좋은 편이다.

반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객관적인 사실을 살펴보면 선덕여왕 재임 기간에 50개에 달하는 성을 빼앗겼으며 그중에 단 하나도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28. 진덕여왕(眞德)

647년 ~ 654년 (8년)

국반 갈문왕, 월명부인 박씨의 딸로 그녀가 즉위한 이유는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성골 혈통이었기 때문이지만 사실상 실질적인 권력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녀가 즉위하는 기간 신라의 변화는 많이 이루어 졌는데 사실 진덕여왕이 주도하기 보다는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고 본다.

29. 무열왕(武烈)

654년 ~ 661년 (8년)

진지왕의 아들 김용수와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의 아들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으며 많은 분들이 김춘추라는 이름으로 기억하실거라 생각한다.

김춘추는 전통사회에서 삼국통일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굴욕적인 조건으로 외세의 힘을 빌려 한반도를 위험하게 만든 인물로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30. 문무왕(文武)

661년 ~ 681년 (21년)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의 여동생 문명왕후의 장남으로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한 국왕으로 평가 받는다.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트리고 신라까지 멸망시켜 한반도를 점령하려고 하였지만 문무왕이 옛 백제인, 고구려인과 힘을합쳐 삼국통일을 완수한다.

31. 신문왕(神文)

681년 ~ 692년 (12년)

문무왕의 장남으로 삼국이 통일된지 5년 후에 즉위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 다양한 제도를 정비하면서 개혁을 통한 통일신라의 전성기 기반을 마련한 군주다.

그는 11년동안 재위하면서 별다른 행적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통일 전쟁기의 공신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32. 효소왕(孝昭)

692년 ~ 702년 (10년)

신문왕, 김흠운의 딸 신목황우의 태자로 재위 기간이 짧고 6세때 즉위하여 16세에 죽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높은편은 아니다.

그래도 어린시절부터 총명했는지 일화가 존재하는데 진평왕의 천사옥대 장식이 용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여 연못에 넣어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봤다고 전해진다.

33. 성덕왕(聖德)

702년 ~ 737년 (36년)

친형이었던 효소왕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랐으며 나이는 어리지만 당시에는 왕권이 강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혼란이나 반역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는 오랜시간 왕위에 재위하며 내실을 다지면서 신라의 태평성대를 이끌었지만 역사에 남을만한 업적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34. 효성왕(孝成)

737년 ~ 742년 (5년)

성덕왕의 첫째 중경이 717년에 죽었다는 설도 있고 태자를 포기하고 중국에서 승려가 되었기 때문에 차남인 김승경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는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특출난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바둑과 관련된 기록이 많은 편인데 그중에서 신충에게 벼슬을 내려준 일화가 유명하다.

35. 경덕왕(景德)

742년 ~ 765년 (23년)

서덕왕, 소덕왕후의 삼남이며 원래는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없었지만 효성왕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태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명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화정책과 녹읍을 부활시키면서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귀족 세력도 강화시키는 모순된 정책을 진행했기 때문에 평가가 갈리고 있다.

36. 혜공왕

(惠恭) 765년 ~ 780년 (16년)

경덕왕과 만월부인 사이의 외아들로 그가 태어날 당시 표훈대덕이 딸은 가능하지만 아들은 안된다고 말하고 성별을 바꿀 수 있지만 나라가 위험해 진다고 한다.

하지만 경덕왕이 성별을 바꿔달라고 천제에게 부탁하여 딸로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 되었으며 반란이 많이 일어나서 왕과 왕빈은 반란군의 손에 처형당하고 만다.

37. 선덕왕(宣德)

780년 ~ 785년 (6년)

내물 마립간의 10대손 이찬 김효방 성덕왕의 딸 사소부인의 아들로 신라 하대를 열게 되었으며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의 행적은 별다른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즉위와 동시에 많은 죄수들을 사면해주고 부모님을 추존한 다음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조공한 것 외에는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38. 원성왕(元聖)

785년 ~ 799년 (13년)

내물 마립간의 후손, 김효양, 계요부인 박씨의 아들로 원래는 김주원이 왕위에 가까웠지만 폭우 때문에 김주원이 참석하지 못하자 신하들이 김경신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이렇게 귀족 회의를 통해서 원성왕을 임금으로 추대한 다음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자 사람들은 김주원보다 김경신이 덕망이 높아 임금에 가깝다고 말했다.

39. 소성왕(昭聖)

799년 ~ 800년 (2년)

원성왕의 태자 김인겸이 단명하는 바람에 손자였던 김준옹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1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병으로 사직하고 말았다.

그는 짧은 기간 제위하면서 국내에서 공부하면 지급하는 국가장학금 같은 제도를 만들었지만 다른 나라로 유학가는 학생이 많아져 소용이 없게 되었다.

40. 애장왕(哀莊)

800년 ~ 809년 (10년)

소성왕의 장남으로 13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숙부 김승언의 섭정을 받게 되었으며 폐단을 정리하고 개혁을 꿈꾸었지만 반란에 의해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는 어린시절 뿐만 아니라 성년이 되어서까지 보위를 지키면서 본인만의 정치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숙부에게 목숨을 빼앗긴 비운의 군주로 볼 수 있다.

41. 헌덕왕(憲德)

809년 ~ 826년 (18년)

소성왕의 동복 동생, 애장왕의 숙부, 원성왕의 아들로 반란과 쿠데타를 통한 집권이 이어졌기 때문에 헌덕왕부터 통일신라의 왕권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조카였던 애장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빼앗으면서 제대로된 업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만든 암군으로 평가 받는다.

42. 흥덕왕(興德)

826년 ~ 836년 (11년)

원성왕의 태자 김인겸의 3번째 아들로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한 정책을 내세웠는데 834년 의식주나 생활용품을 규제하는 골품제를 강화시키면서 문제를 일으킨다.

그는 백성을 돌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사치품 사용을 줄이기 위한 제도를 도입하고 사용하는 물건을 엄격하게 제한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는 골품제를 고착화 시켰다.

43. 희강왕(僖康)

836년 ~ 838년 (3년)

원성왕의 3남 김예영의 아들 이찬 김헌정의 아들로 809년 김언승, 김수종과 애장왕의 시해를 동참했으며 본인은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희강왕부터 신무왕까지는 신라 왕실의 왕권 다툼이 과열되는 구간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44. 민애왕(閔哀)

838년 ~ 839년 (2년)

원성왕의 손자 대아찬 김충공, 귀보부인 박씨 사이의 아들로 재위기간이 1년 정도로 짧기 때문에 아버지를 추증하고 상대등을 임명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민애왕은 부당한 방식으로 임금이 되었기 때문에 본인또한 희강왕을 살해했다는 명분으로 일으킨 반란에 의해서 시해당하고 말았다.

45. 신무왕(神武)

839년 (181일)

김우징은 처해진 소속의 군대와 김주원 계인 김양의 도움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민애왕을 살해하는데 성공하고 왕위에 올랐지만 등에 난 종기에 의해서 승하하고 만다.

그는 왕위에 오르고 아버지의 복수도 이루었지만 즉위 기간이 짧아 별다른 업적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나마 혼란스러운 정계의 상황을 정리했다고 평가 받는다.

46. 문성왕(文聖)

839년 ~ 857년 (19년)

신무왕 김우징의 아들로 반란 시대를 끊어내고 통일신라의 수명을 증가시켰으며 바다를 안정시키고 무역로를 확보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반란군을 모두 진압하고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성공했으나 857년 본인의 아들이 아니라 숙부 김의정을 후계자로 지정하는 유언을 남기고 승하하고 말았다.

47. 헌안왕(憲安)

857년 ~ 861년 (4년)

김우징의 이복 동생, 문성왕에게는 숙부에 해당하는 인물로 4년간의 제위기간 중 당성군에서 큰 물고기가 잡혔다는 기록 외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는 편이다.

훗날 궁예가 부석사에 들어서면서 헌안왕의 초상화를 보았는데 자신의 눈을 잃게만든 헌안왕의 어진을 칼로 자르자 찢어진 곳에서 피가 흘렀다고 한다.

48. 경문왕(景文)

861년 ~ 875년 (14년)

희강왕의 손자, 김계명의 아들로 화랑으로 활동하며 명석함을 자랑했지만 임금의 자리에 오른 다음에는 각종 재난과 귀족의 반란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경문왕은 귀가 매우 긴 편이었는데 두건을 만드는 장인은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못하고 죽기전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쳤다고 한다.

49. 헌강왕(憲康)

875년 ~ 886년 (11년)

경문왕의 장자, 정강왕의 형, 진성여왕의 큰오빠로 머리가 매우 총명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불교와 국학의 발전을 통해서 신라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농사는 풍년에 백성들은 먹을것이 넉넉하여 안정되고 즐거워하니 나름 태평성대 시절을 누린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50. 정강왕(定康)

886년 ~ 887년 (1년)

경문왕의 차남, 현강왕의 남동생, 진성여왕의 둘째오빠, 효공왕의 숙부로 형인 헌강왕이 서자 김요만 남기고 죽었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정강왕은 887년 1월 한주 이찬 김요의 반란에 군대를 파병하여 그를 처단했으며 여동생 김만이 왕위를 잇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20대 중반 승하하였다.

51. 진성여왕(眞聖)

887년 ~ 897년 (10년)

한국사 3번째이자 마지막 여왕인 진덕여왕은 한국사 유일하게 남매 계승을 하였는데 남자같은 체구에 미소년과 음란한 행위를 즐기는데만 집중했다고 한다.

사실 나라가 무너지는 시기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좋은 상황은 아니었으며 농민과 지방 도적들의 반란이 많아지면서 자진 퇴위하고 갑작스레 사망했다.

52. 효공왕(孝恭)

897년 ~ 912년 (15년)

효공왕은 혈통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신라 역사상 유일한 서자 출신 임금으로 헌강왕이 사냥을 하던 도중 만난 여자와 동침하여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다만 효공왕이 재위할 당시의 신라는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될 궁예와 견훤의 세력에 의해 통제권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실권없는 임금이라고 볼 수 있었다.

53. 신덕왕(神德)

912년 ~ 917년 (6년)

신라 초기 마지막 왕 아달라 이사금의 먼 직계 후손으로 그의 의부였던 박예겸은 헌강왕 치세에 시중을 역임했지만 경문왁계가 정치를 독점하자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의 즉위는 728년만에 박씨 가문이 신라의 왕권을 잡았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지만 나라의 함락을 지키는데만 급급한 모습이었다.

54. 경명왕(景明)

917년 ~ 924년 (8년)

신덕왕의 아들로 신라의 왕족이었지만 왕위를 빼앗긴 일길찬 김현승의 반란을 막아내고 갈등을 봉합하면서 화합을 위한 정치를 펼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경명왕 4년(920)년 신라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졌던 대야성을 견훤의 후백제에게 빼앗기면서 고려의 왕건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정통성을 잃게된다.

55. 경애왕(景哀)

924년 ~ 927년 (4년)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복동생, 신라의 마지막 박씨 왕으로 매년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며 굳건한 동맹을 유지했지만 신라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경애왕은 나라가 풍전등화에 있는 상황에서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가 견훤에게 잡혀 자결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데 여기에는 많은 반론이 존재한다.

56. 경순왕(敬順)

927년 ~ 935년 (9년)

문성황의 후손,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은 견훤이 경애왕을 자결시킨 다음 임금으로 추대한 왕이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저항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도 고려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항복 선언을 하면서 935년 12월 태조 왕건에게 국왕 다음으로 높은 벼슬을 내려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천수를 누렸다.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의 대중적인 이미지는 나쁘지만 삼국통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업적은 외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불안정한 모습으로 한계를 드러내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고려왕조가 이를 계승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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