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왕조 순서와 계보 정리 – 31대 역대 마지막 의자왕 삼천궁녀 진실

한국의 왕사 중에서 가장 불행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백제 왕조는 678년 동안 31명의 왕이 나라를 다스렸으며 다른 국가에 비해서 재위 기간이 짧은 왕들이 많은 편이다.

백제의 왕들은 대부분 왕호가 아닌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경우가 많으며 근초고왕 이후부터는 대부분 전쟁이나 반란에 의해 비명횡사했기 때문에 생년과 업적이 정확하지 않다.

백제의 역대 왕들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기 때문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 등의 고서에 남아있는 기록을 참고한 경우가 많다.

1대 온조왕

B.C. 18-A.D. 28

백제를 건국한 초대 임금으로 고구려의 고주몽, 신라의 박혁거세처럼 탄생한 설화, 전설 같은 이야기는 없지만 백제의 모든 왕들 중에서 가장 많은 기록이 남아있으며 자신의 힘으로 나라를 건국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에는 고구려의 지배 세력과 힘을 합쳤을 것으로 해석한다.

2대 다루왕

28-77

온조왕이 세상을 떠나자 바로 왕으로 즉위했으며 재위 기간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온조왕과 마찬가지로 낙랑, 말갈과 밀고 밀리며 피 튀기는 싸움을 했는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최초로 신라를 공격해서 수백 년간 애증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3대 기루왕

77-128

다루왕의 큰 아들 기루왕 역시 재위 기간이 상당히 길어서 논란이 되고 있으며 당시 천재지변으로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는 신라를 공격하다가 105년 화친을 보내 우호관계를 유지했지만 신라에서 반란을 도모한 아찬 길선을 받아줘 사이가 틀어진다.

4대 개루왕

128-166

재위 기간이 39년에 달하지만 업적에 대한 기록은 고작 7줄뿐이며 북한산성을 쌓았다는 내용이 있지만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산성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5대 초고왕

166-214

신라의 반역자 아찬 기선의 송환 문제로 양국이 나쁜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초고왕이 즉위하면서 공방전은 더욱 심해졌으며 말갈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두 나라와 전쟁을 하던 기록과 자연재해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6대 구수왕

214-234

초고왕의 장남으로 키가 2미터가 넘는 장신이었으며 역시나 말갈, 신라와 전투를 이어갔는데 말기에 들어서 하늘에 밤알 크기의 우박이 내리는 자연재해로 나쁜 평가를 받게 된다.

7대 사반왕

234-234

구수왕의 맏아들로 유언을 통해서 즉위했지만 이미 세력이 약해진 상태였으며 나이가 어리고 후비에게 얻었다는 추측 때문에 정통성 문제로 바로 폐위 당한다.

8대 고이왕

234-286

개루왕의 아들로 재위 기간을 보면 100세가 훨씬 넘는 나이를 자랑하기 때문에 고이왕을 실질적인 백제의 시조라는 학설이 존재하고 이후의 계보를 고이왕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뛰어난 무예를 자랑하며 율령 반포와 내정을 정비하고 폐위하기 전에 신라에게 화친을 요청한다.

9대 책계왕

286-298

고이왕의 맏아들로 체격이 건장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대방 태수의 딸과 결혼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막고 허물어진 위례성을 수리하기도 했는데 그에 대한 기록은 5줄에 불과하다.

10대 분서왕

298-304

총명하고 몸가짐이 바른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사군의 전쟁에서 전사한 책계왕의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낙랑의 서현을 기습해서 점령하는 업적을 세웠지만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다.

11대 비류왕

304-344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지만 구수왕이 죽은 지 70년이 흐르고 재위 기간이 40년이기 때문에 적어도 110세는 넘게 살았다고 볼 수 있으며 별다른 업적은 존재하지 않고 백성에게 선정을 베푼 기록만 존재한다.

12대 계왕

344-346

삼국사기에 따르면 계왕이 즉위하다, 계왕이 죽다 2줄이 전부이며 2년 만에 승하했는데 고이왕을 시작으로 고이왕 – 책계왕 – 분서왕 – 계왕에 걸친 고이왕계는 여기서 끊어지게 된다.

13대 근초고왕

346-375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그가 재위한지 2년부터 21년 사이의 기록은 모두 공백으로 돼있는데 오히려 일본서기의 왜곡된 자료를 통해서 그의 업적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내치의 안정, 마한 정복, 남방 평정, 고구려와 전쟁, 일본 규슈 진출, 중국 산둥 진출 등으로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지만 불분명한 자료가 많아 과장, 축소로 얼룩져있다.

14대 근구수왕

375-384

근고초왕의 아들로 뛰어난 전공을 세운 것으로 유명한데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고구려의 평양까지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작 즉위를 하고 난 다음의 업적은 없는 편이다.

15대 침류왕

384-385

근구수왕의 장남으로 재위 기간은 짧지만 불교를 공인하면서 본격적으로 백제에 불교가 퍼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16대 진사왕

385-392

근구수왕의 차남, 침류왕의 동생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자가 어리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다고 하지만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침류왕이 죽자 아신왕의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가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기록되있으며 현대의 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정통성의 문제가 있지만 그는 고구려와 전쟁을 하며 좋은 정치를 펼치면서 좋은 활약을 펼쳤는데 나중에는 사냥과 유희를 즐기고 고구려에 광개토대왕이 즉위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17대 아신왕

392-405

근초고왕 시절 백제의 전성기가 몰락하는 원인을 제공한 왕으로 고구려의 전쟁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계속 패배했으며 광개토대왕에게 잡히자 노비가 되겠다고 말하며 항복을 했는데 이후에도 왜구를 끌어들이며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패배하게 된다.

18대 전지왕

405-420

부친 아신왕이 광개토대왕에 패배한 다음 노객이 되겠다는 항복을 한 이후 복수를 위해서 왜구를 끌어들이고 태자 전지왕은 볼모로 잡혀서 일본에 머물게 된다.

405 아신왕이 승하하면서 왕위에 올라야 하지만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데 해씨 귀족의 지원을 받아서 무사히 왕위에 오르지만 별다른 업적은 없다.

19대 구이신왕

420-427

삼국사기에는 즉위와 사망에 관련된 기록만 남아있으며 일본서기에 따르면 나이가 어려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정변으로 인해 비유왕에게 암살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20대 비유왕

427-455

아름다운 용모로 언변이 좋았기 때문에 외교적인 능력이 뛰어났으며 삼국사기에는 구이신왕의 아들,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나이를 생각하면 구이신왕의 형제일 가능성이 높다.

남북조시대 송나라에게 조공을 받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강력해진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해 신라에 화친을 요청하고 좋은 사이를 유지하면서 나제동맹을 성립시키게 된다.

21대 개로왕

455-475

즉위하고 14년 동안 아무런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나마 나제동맹 덕분에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공격을 막고 북위에 고구려 침공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개로왕은 대를 이어서 원수로 생각하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신라뿐만 아니라 왜군, 중국군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이런 모습이 고구려를 자극해 장수왕의 침공을 받고 한성이 무너지면서 목숨을 잃게 되는데 일국의 왕이지만 묘비도 없이 매장되었다.

22대 문주왕

475-477

삼국사기에는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적혀져 있지만 일본서기의 동생이라는 기록이 근접하다고 추측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지만 우유부단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에는 장수왕의 공격을 신라와 나제동맹을 통해서 막고 있었는데 한성이 함락한 이후 웅진성(공주시)으로 도읍을 옮기고 방어하지만 해씨 가문의 해구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23대 삼근왕

477-479

왕실의 권위가 약해지고 문주왕도 해구에게 시해당했기 때문에 정상적인 국정 운영을 하지 못했지만 덕솔 진로에게 명령하여 정예 군사 5백으로 해구의 반란을 진압한다.

13세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해씨 세력을 무너트린 것을 보면 어느 정도 능력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이후 권력을 잡은 진씨 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4대 동성왕

479-501

문주왕의 동생 곤지의 아들로 해구의 반란을 잠재웠던 진씨 세력에 의해서 옹립되었으며 고구려와 말갈의 연합군을 신라, 가야와 연합해서 격퇴하고 외교적인 능력도 발휘한다.

그동안 최악의 상황을 달리고 있었던 백제를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지만 말년에는 사치와 향락을 즐기며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을 무시했는데 그동안 왕의 정책에 불만을 표시하던 위사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의 공격을 받고 얼마 후 목숨을 잃는다.

25대 무령왕

501-523

삼국사기에 따르면 무령왕은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키가 8척에 따르는 백성이 많았다고 하는데 백가의 반대파에 의해서 추대되었기 때문에 동성왕의 복수를 위해 백가를 토벌하게 된다.

그는 503년 고목성을 공격하는 말갈족을 격퇴시키고 가야를 공격하고 세력을 넓히면서 힘을 키우면서 왕권을 강화하고 중국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안정을 도모했다.

웅진 시대의 군주들 중에서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무령왕은 백제 무덤 중에서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무령왕릉의 주인으로 일제강점기 약탈을 당하지 않아고 발굴된 것으로 유명하다.

26대 성왕

523-554

부왕 무령왕에 이어서 즉위했으며 부지가 넓고 웅진성과 가까운 사비성으로 천도를 단행하면서 왕권과 국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며 중국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문화와 불교를 전파한다.

당시 백제는 동맹국 신라에게 의존하며 고구려와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했는데 성왕은 자신의 딸을 신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며 불안한 나제동맹을 강화하고 고구려와 싸움을 지속한다.

하지만 성왕은 신라가 정권을 교체하는 시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군사를 일으키지만 패배해서 목숨을 잃고 1세기 넘게 이어진 나제동맹이 깨지면서 두 나라는 불구대천의 원수 지간이 된다.

27대 위덕왕

554-598

백합야 전투에서 고구려 장수와 일기토에 승리하고 자신감이 붙은 위덕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신라를 공격해야 한다는 고집을 부리면서 결국 관산성 전투에서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며 승려가 되려 했지만 신하들의 만류로 왕위를 승계한다.

그는 고구려와 신라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반격을 가했지만 영토를 넓히지 못했고 국제적인 고립을 피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진나라, 수나라에 조공을 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28대 혜왕

598-599

위덕왕의 건강이 나빠져 정사를 돌보지 못하고 그의 아들은 일본에 사절로 파견되면서 동생인 혜왕이 노년에 잠깐 재위했기 때문에 별다른 기록이 없으며 즉위 1년 만에 승하했다.

29대 법왕

599-600

삼국사기에서는 혜왕의 아들, 수서, 일본서기에는 위덕왕의 아들로 나와있는데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며 지나치게 불교를 믿어서 백성들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는 백성들이 물고기나 짐승을 잡지 못하도록 그물이나 도구를 태워버리고 적군이 쳐들어와도 죽이지 말라는 살생 금지령을 내렸는데 정치적 혼란을 신앙에 의지한 것으로 보인다.

30대 무왕

600-641

출신이 불확실한 왕으로 법왕, 위덕왕의 아들, 또는 위덕왕의 서자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하며 서동 설화<서동요>의 주인공은 무왕, 왕비는 신라의 선화공주라는 이야기가 존재한다.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 역시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불교를 전파했고 신라에 맹공을 퍼부으면서 수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며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고구려와 수나라가 충돌할 당시 지원군을 보내지 않고 신라를 공격해 당나라가 신라와 손을 잡는 계기를 만들고 무리한 토목 공사와 금마저 천도 계획으로 국력을 약하게 만들었다.

31대 의자왕

백제 왕조 순서 계보
백제 왕조 순서 계보

641-660

무왕의 장남,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 중반까지는 친고구려 정책을 유지하고 신라를 공격하면서 백제의 중흥기를 이끌었기 때문에 신라 왕조가 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말년에 의자왕의 사치와 왕비의 전횡, 지나친 왕권 강화와 숙청, 신하들의 간헌 무시로 백제는 멸망의 조짐을 보였으며 나당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도 계백만 병사를 이끌고 온다.

결국 김유신의 공격으로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멸망하는데 의자왕의 평가를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서 변질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증거가 없기 때문에 추측만 할 뿐이다.

삼천궁녀 이야기도 있지만 백제 말기의 수도 사비성의 궁터는 그만큼을 수용할 만큼 넓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숫자를 나타내는 문학적 수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국가와 다르게 백제에 대한 기록은 부족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 책이지만 백제의 기록을 인용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참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백제는 일찍부터 외국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백제 고유의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로 발전시켰지만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아서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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